『데모』에 대한 대담
승언 “실존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이 세계에 실존하는 것과 등장하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혜희 등장은 감각되기를 꾀하는 일인 반면 실존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말꼬리 잡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어.
승언 그럼 혜희는 쓰신 바와 달리 실존합니까?
혜희 쓰인 바에 따르면 혜희는 실존하지 않는다고 선언되고 있는데, 방금 말한 대로 그건 내가 쓴 게 아니야. 그냥 이 얘길 해두고 싶은 거야. 내가 실존하는지 안 하는지 나는 별 관심 없어. 정확히는 내가 정할 일이 아니라고 느끼는 거지.
승언 말인즉슨 당신은 엄밀히 본 시집의 저자로서 등장하고는 있지만, 그 시집에 수록된 시들을 쓰지 않았다는 건가요? 그렇다면 저자 대행인 셈입니까?
혜희 맞아. 그게 내 주장이야.
승언 저자 대행인 당신이 실존하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당신의 관심은 아니겠지만, 독자인 저의 입장에서는 나름 중요한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시 예술에서(분명히 시 예술만의 문제는 아니겠으나) 시인의 인장이 분리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제가 보기에 꽤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당신은 문학으로 존재합니다... 그렇죠? 저로서는 당신이 등장했어야 할 전반적인 이유가 궁금합니다. 어떠한 까닭으로 당신은 등장해야만 했던 것입니까? 그것은 스스로가 짊어진 사명입니까, 아니면 기저 욕망입니까, 혹은 대리자에게 주어진 지시 과업입니까?
혜희 별 이유 없다고 하면 어떨까... 적어도 내가 아는 이유는 없어. 누가 나한테 알려준 적도 없고. 어쩌다 보니 일이 그렇게 된 거지. 내 추측은 이거야. 못할 거 없으니? 가끔 내가 단지,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의 산물이 아닐까 싶다. 이런 생각은 약간 고통스러워. 불쾌하기도 해. 미안하기도 하지(누구에게?). 하지만 동시에 이상한 종류의 희망을 주는 거야. 그렇다면... 내가 등장해야 할 별 이유가 없다면, 그런데 한다면... 이건 복잡한 일이 아니야. 나는 감히, 누구나 어느 정도는 그럴 거라 생각해. 마찬가지로 아무 등장할 이유 없는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이 시들을 내가 썼고, 내가 실존한다고 생각해도 좋겠지. 자신의 말을 자신의 말이라고 생각해도 좋듯...
승언 당신은 쓰는 사람으로서 또한 쓰이고 있지만, 한편으로 말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숱한 말하기 방식 중에서 시 형식을 따르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혜희 그 질문엔 여러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하나를 먼저 고르자면, 그것은 내가 원한 일이 아니야. 그리고 하나 더 고르자면, 아무래도 그 형식이 이런 요설(나와 같은 처지)에 꼭 준비된 듯 알맞다고 느끼기 때문일 거야. 굳이 시가 아니더라도 좋을까? 적어도 지금으로선 이 근처에서나 드러나는 것 같아. 아니면 여기에 가져오고 싶은 건지도 몰라. 만연한 이런 처지를. 왜 굳이 여기인지... 어쩌면 반대로 여기 때문인 게 아닐까? 다시 말하자면 내가 원한 일이 아니야. 나는 배정된 셈이야. 온통 원치 않은 일들투성이야. 그리고 이것은 원치 않은 일을 대하는 내 나름의 방식이다.
승언 데모에 관한 당신의 입장을 묻지 않을 수 없군요. 당신은 지금 데모 중입니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무엇에 관한 데모입니까? 데모에 관한 당신의 생각과 입장은 무엇입니까? 데모는 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까?
혜희 지금 낮이 오고 있습니까? 낮이 무엇에 관해 오고 있습니까? 낮에 관한 나의 생각과 입장은? 낮은 왜 오는 것이며 왜 와야 하는 것입니까? 이렇게 바꿔서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데모에 대한 내 가장 주된 입장이야. 내가 지금 데모 중인가? 그랬으면 좋겠네. 아니길 또 바라고. 그것은 데모가 끝났으면, 그리고 있었으면 한다는 데 관한 데모야. 그건 끝나지 않고, 그건 아직 없어. 데모가 왜 일어나(야 하)냐면, 데모가 끝나(야 하)기 때문이야. 난 데모가 싫어. 난 데모를 원해. 데모는 내 것이 될 거야. 데모는 내 것이 아니야. 이런 식으로밖에 말할 수 없네.
승언 당신이 말하는 데모의 성립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것은 무엇일지요. 그리고 데모의 해산은요? 그 데모는 오늘 세계의 체제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데모들처럼 명분으로 일어나고 목적을 달성하면 해산하는, 합목적적인 데모입니까?
혜희 설령 목적을 달성하고 해산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데모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끝나지 않아. 왜 목적이 달성되지 않는 걸까? 그 까닭을 나 자신이나 너희들로부터 찾지 않고, 데모가 아닌 시공으로부터 찾으려 하는가? 그리고 그 탐색이, 결국엔 다음 데모를 통할 수밖에 없는가? 아마 그게 데모 성립의 핵심일 거야. 너와 나를 그날 그곳으로 보내고 있는가? 또는 그러지 못했는가? 그래서 그 데모는 만족과 무관하고 소진도 폭발도 아니게 돼. 축제가 아니고, 해산을 당하는 거야. 가장 크게는 자신에 의해. 한계선 때문에.
승언 데모와 관련된 말을 듣고 나니 당신의 시에서 종종 나타나는 늙은이 화자에 관해 묻지 않을 수가 없네요. 왜 그들은 당겨 늙거나, 또는 미래에 미리 가 있는 것입니까?
혜희 노인이니 앞자리에 앉혀야지. 그 자신들이 앞으로 가고 싶은 편인 것도 같다. 그들은 왜? 이제는 봐둬야 하니? 이제까지는 아니었어도, 이제는 봐둬야 하니까? 그들이 원하는 곳에 있게 해주는 외에 내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
승언 데모에 이어, 종말은 어떻습니까? 종말의 분위기 역시 어쩐지 가득합니다. 종말은 오고 있습니까? 우리가 막을 수나 있습니까? 느리게 (어쩌면 보기보다 빠르게) 다가오는 듯이 느껴지는 종말을 두고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합니까?
혜희 그것은 단기적으로 오고 있고, 장기적으로도 오고 있다. 그것은 겹겹이야. 그것은 우리가 있는 동안 한차례 지나갔고, 우리가 없을 때 이미 지나갔었어. 종말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 쪽이 사건이지. 너희 대체 뭘 하려는 거니? 무슨 꿈을 꾸고 있니? 그것을 막는다는 생각보단 남겠다는 생각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어떻게 남겠다는 건지 어디에 적절하다는 건지는 모르겠다. 자세라면 알아내려는 자세가 좋게 느껴져.
승언 알아낸다고요? 무엇을 말입니까? 종말을? 예컨대 형세 같은 것을요?
혜희 첩첩의 종말에 대하여 어떻게 남을 것인지. 종말에 대하여 남겠다는 생각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승언 당신의 소속이 의심스러워지는군요... 공동창작전선은 뭐하는 곳입니까?
혜희 아무것도 안 하는 동인. 이름값을 하는 곳. 왜 있는지 모르겠는 것들. 거짓말이야. 그런 동인은 없어. ‘없기’를 하고 있다거나 ‘있는 척’을 하고 있다 하면 맞겠어. 이거 읽으면 또 한마디 하겠네.
승언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도 이상합니다만... 당신은 직업적으로 무엇입니까?
혜희 아마 배달원이나 전령? 도주를 위한 기만용의 희생역? 특정 상황에서만 동원되는 문자 신호 모음? 발화 체계? 이런 때에 쓰라고 화자 대리라는 직함을 주던데, 무슨 개짓거린지 몰라. 전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어. 내 직업인지 뭔지를 써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담당자께 그냥 무직으로 해주시되 정 곤란하다면 시인으로 해도 어쩔 수 없겠다고 전했더니 시인으로 되더라고. 하여튼 무직은 안 된다는 거지. 무직이면 죽여버리려는 시대라?
승언 시인으로 봐준다고 하더라도 무직 비슷한 것에다가, 몸담은 곳은 없기를 한다거나 있는 척을 하고 있는 위장 조직이라… 당신 혹시? 좌파야?
혜희 그런 질문 받으면 보통 어떻게 답하지? 그걸로 할래. 그걸로 적당히 꾸며서 써줘.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
‘『데모』 에 대한 대담’은 『데모』 출간 전 해설대용 또는 도서소개용 텍스트로의 사용 가능성을 가늠해보기 위해 출판사에서 주선하여 이루어진 인터뷰입니다. 도서에 쓰이지는 않았습니다. 여기 업로드된 것은 하혜희 측의 저장본이며, 출판사의 허락을 구했습니다.